아련한 향수의 뒷골목

민초 이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134)

<아련한 향수의 뒷골목>

*그리운 고국 산천

노인봉아 앞동산아 / 내가 놀던 강당아/ 나는 간다 / 구름같이 흘러서 간다 / 꽃이 피고 잎이 피며 / 나비가 날 때면/ 만리타향 타국에서 / 너 역사의 꿈을 꾸리라 / 산천초목 잘 있거라/ 형님 형님 잘 계세요/ 내가 없드라도/ 어머님을 잘 봉양해/ 암탉이 크거든날 / 어머님을 잡아주소서/

위의 동요같은 노래의 한 연, 이는 내가 고향에서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다. 일절은 기억이 나지만 90여년이 넘어서 이 노래의 가사를 다 기억할 길이 없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우리집은 80가구의 종씨들인 경주이씨에서 분파된 우개 이가들이 반촌을 이루고 살았다. 우리집은 우개 이가의 대종손으로 큰 농사를 지으며 참 잘살았다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서울 돈암동에 집이 있었는데 그때 큰 형님은 지금의 중앙고등학교에 다녔고 둘째 형은 용산중학교에 다녔다. 나도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용산중학교에 진학을할 계획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형님들은 돈암동 집을 비운 채 고향으로 오시게 되었다.

그 때 둘째형님이 이 동요같은 노래를 지어서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지만 우리집에 유일하게 유성기라는 것이 있어 대청마루에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괴물같은 곳에서 사람의 노래가 흘러나와 야릇한 생각을 하며 노래를 흥얼흥얼 하면서도 그 진귀함이란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에 그 괴물에서 노래가 나오게 하기 위하여 그 유성기에 테잎을 빙빙 돌려 기계가 계속 작동하는 힘을 주고 유성기판 LP판에 15곡 정도의 싱어들이 삽입한 노래가 흘러 나왔다.

기억으로 홍도야 울지마라, 울밑에선 봉선화,신라의 달밤,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의 노래가 유성기에서 흘로 나올 때는 탄복을 한 기억이 새롭다.

큰형님은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며 금강산 유람을 하며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 떼 그 사진을 보고 또 보았던 기억이 난다.

95,6년전의 일을 되새김하는 즐거움이 있지만 여기서 줄이고 향수에 젖은 시 한편을 남겨본다.

<향수의 뒤안길 산문 시 전문>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로키산 계곡계곡

탁란의 굽이길 구비구비

로키산 계곡 어디엔가 삼천갑자 동방석을 찾아서

미화 200불 들고 태평양 열두 고개를 넘어 왔었다

 

괴나리 봇짐 지고 헤어진 흰고무신을 끌며

넓은 대륙에서 심호흡하는 신비로움에

행상길로 하루해를 넘기는 탁란의 울음소리

나를 반기는 동구밖 까치 울음소리였던가

 

허기진 뱃가죽에 각설이 타령을 하며 이 가게 저 가게

외진 길에 각설이 타령, 딸이 둘 아들이 하나

떳떳하게 내가 벌어 내가 살아야 하는 자존심의 인계점

울기도 웃기도 하는 눈물방울 땀방울이

조국과 5천만 민족에 포효하던 나르시스트

거기에 생존의 진리는 한탄을 하는 외로운 황혼빛

 

삼봉 정도전을 배출한 봉화와 영주의 선비촌에

퇴계 선생이 호통을 치니 춘향이는 소식도 없고

좋아하던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식어가는 단양고개 주막집에서 막걸리 한됫박

타들어가는 목줄, 빚지고 살아가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낭인의 안식처는 어디메일까

 

그렇게 그렇게 살아온 반세기의 남의 땅

탁란의 울음소리 그칠 날 없어도

보우강가 오리떼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야심에 노예가 되지 않고 내 의지를 욕망에 불태우며

용기와 양심에 나 자신의 생존의 빛을 찾아

간다 간다 흙의 고향으로 낭인 시인 간다.

(민초 이유식 시인 2024년 6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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