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헬렌 시
438,000번째 시침(時針)의 울음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아득히 먼 억 광년 거리에 서서
언뜻언뜻 구름 사이 떠오르는 정다운 얼굴 하나
팔 뻗으면 손끝 닿을 듯 고즈넉한 하늘
해종일 바라보아요
흰 구름에 걸터앉아 유유히 지나시는 길에
한줄기 햇살로 내려오셔
창가에 노랗게 잠시만 머물다 가셔요
따끈한 마음 한 잔 대접하고 싶어요
둘이 함께 걷던 길섶에는 올해도 초록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저무는 계절을 흥정하고
바람은 벌써 팔월을 헐값에 떨이한다고 잉잉 외쳐댑니다
부재중인 내 영혼은 현재진행형
난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하니
그냥 공으로 가져가라 하네요
푸지게 퍼담아주는 팔월 끝물을
무겁게 이고 돌아오니
토방에 서성거리는 수상한 바람의 눈짓
그는 가고 없는데 저어기 가을은 오고
눈치없는 세월은 잘도 흐르네
떠난 후 떠나지 못하고 보낸 후 보내지 못한
애타는 가슴
애절하게 돌아가는 지난날의 흑백 필름 속을
저벅저벅 걸어나온 그가
기어이 발자욱을 벗어 던져버리던 날
발자욱이 없으니 땅을 디딜 수 없고
땅을 디딜 수 없어
공포가 칼날처럼 뻔뜩이는 오싹한 옻칠 갈색 상자를
소문만 무성한 비밀의 나라 지구 밖으로 끌고 가버렸네
438,000번째 시침(時針) 끝에서
눈물방울 떨군 마지막 시간의 시체(屍體)를
보듬고 나도 이제 가야 할 시간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억 광년 거리를 조금씩 좁히며
하늘을 향해 매일 가까이 다가가네
오늘도 한 뼘이 더 가까워졌네
다시 만나는 그날은
마알간 유리잔 높이 들어
적포도주 붉게 찰랑이는
축배를 해야겠네
이별없는
행복한 잔 맞춤
잔 그랑
그 라 랑
그리움 노래하는 잔 울림 멀리 멀리
메아리치는 그 날
나도 내 발자욱의 무게를 훌러덩 벗어 던지고
가벼이 누워 당신 곁으로 가려네
(*50년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438,000시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