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맞는 비
-더불어 사는 세상의 의미는
-진정 그와 같은 입장이 돼주는 것
‘늦가을에 내리는 비 때문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도 좋다/ 여름비처럼 세차지 않고/ 다정한 두 사람의 밀어같이 은혜롭다/ 가을비를 부르며 종로나 명동을 걸어본다/ 빈 커피잔에 담기는 가을 벌레소리/ 여름 여인은 싸늘한 모래 위에 발자국만 남기고/ 지금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다시 돌아올까. 그 발자국으로/ 여인아!’ (늦가을비 - 황금찬)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엔 우산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추락한 낙엽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시신처럼 나뒹구는 이맘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0…우산 없이 처량하게 비를 맞고 걷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할까요.
실연(失戀) 당한 사람? 마음이 몹시 울적한 사람? 오갈곳이 없는 사람?
아무튼 혼자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은 그다지 행복한 상황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은 우산이지만 함께 쓰도록 받쳐줄까요, 아니면…
0…고 신영복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 비를 맞고 가면 처량합니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맞으며 걸어가면 덜 처량합니다.”
즉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그와 같은 처지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처지가 같지 않고 정이 같지 않은 사람의 동정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0…우리는 이런 경우를 흔히 봅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또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무조건 ‘힘을 내라’고만 하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함께 실컷 울어주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계단도 오르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하면 된다”고 몰아부치는 것은 도움도 격려도 아닙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다른 우회길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가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입니다.
0…신교수는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면 우선 당장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동정받는 사람에게 상심(傷心)이 된다 했습니다.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동정받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함께 맞는 비'는 신교수가 즐겨 쓰던 붓글씨 문구였습니다.
저 역시 이 문구를 즐겨 인용합니다.
0…지난 2016년 1월에 세상을 뜬 시대의 참지성 신영복 교수.
논어, 맹자, 장자, 노자를 비롯해 동.서양의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고뇌어린 성찰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투영해낸 그의 저술은 한구절 한구절이 모두 금언(金言)입니다.
그 중에도 신교수가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관계’였습니다.
0…“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37℃의 열덩어리로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더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0…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할 대상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0…신교수는 생전에 늘 ‘관계와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그중에도 ‘처지와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역설했습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중시한 것은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가슴으로 함께 나누는 공부였습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0…남을 돕는 것도 처한 입장이 같아야 진정성을 담게 됩니다.
처지가 다르면서 돕거나 위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맞는 비는 누굴 도와도 그 정이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0…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친구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 진정한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우산없이 가을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함께 동행이 되어줄 사람이 있나요?
“봄꽃도 먼저 피면 반갑고 이쁘기는 하더라만, 꽃샘바람 불고 눈보라 치면 속절없이 지는 법이니라. 세상이 만화방창할제 더불어 피어나야 절기를 누리는 거란다…” (황석영 소설 ‘여울물 소리’ 중) (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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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