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시대의 시인

-돈과 권력이 지고의 가치인 세상

-정신세계 살찌울 문화예술에도 관심을

*토론토 한인극단 브랜치스의 뮤지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공연 장면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경제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지폐, 종이 두 장만 남을 뿐이다” (김광규 시인 ‘생각의 사이’)

현대사회에서는 한 가지 분야를 깊이 아는 스페셜리스트가 대접받는다.

자기가 아는 분야 바깥의 다른 일은 전혀 몰라도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려고 전력투구한다.

0…그러면 이 세상에 스페셜리스트만 넘쳐나면 어떻게 될까? 과연 낙원이 될까?

어떤 직업을 가졌건, 상황이 어떻건, 모든 사람이 제 분야만 생각하고 다른 분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자.

각자 자기 전문의 벽을 쌓고 들어앉아 사람들 사이에 소통도 안되고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는 먹통세상이 될 것이다.

이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선 어떤 일을 깊이 알지는 못해도 세상일을 두루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이’의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0…‘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묘비명’)

시인의 말대로 이 세상엔 한 줄의 시도,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큰 재산을 모아 잘 살게 되면 주위에 추종자들이 몰리게 마련이다.

굳이 문화예술 같은 고상한 식견(識見)이 없어도 많은 예술인과 교류하며 상류층의 삶을 누릴 수 있다.

0…예로부터 예술가와 문인들은 대체로 가난하다.

애당초 돈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런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흘 굶고 남의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 글을 쓰는 문인도 배가 고프면 위의 시에서 보듯 (전혀 마음에도 없고 신념에도 어긋나는) 졸부의 묘비명을 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한국문단의 큰별 박완서 작가는 지난 2011년 타계 전에 “문인들은 돈이 없다.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0…문화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유층의 후원이 절대로 필요하다.

여기서 메세나(Mecenat)라는 말이 나왔다. 기업의 문화 및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뜻하는 용어다.

고대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예술가들을 활발히 지원한 부호이자 정치가인 마에케나스(Gaius Clinius 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0…서양에서는 14세기부터 왕, 귀족, 자본가들이 예술인을 후원하는 제도(patronage)가 존재했다.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기에 궁정인들(courtiers)의 후원은 문화예술을 꽃피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는 부와 권력을 지녔어도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하면 진정한 지도층이라 할 수 없었다. 후원제는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이르는데 필요한 열쇠였다. 

0…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The Medicis)은 지독하게 돈을 모아 우아하게 썼던 대표적인 예다.

평민 출신으로 환전상을 통해 부를 모은 로렌조 메디치는 축적한 부를 단테, 갈릴레오,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피렌체의 문인, 과학자, 조각가, 화가 등을 후원하는데 아낌없이 썼다.

덕분에 피렌체(Florence)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답고 수려한 문화예술 도시로 존재하게 됐다.  

0…무릇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문화예술도 자본의 지원이 있어야 발전하고 반대로 자본도 문화예술이 뒷받침돼야 정신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래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유형은 경제적 여유도 있으면서 고상한 문화예술 취향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0…특히 이민사회에서는 경제적 여유와 문화예술 취향을 겸비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억척스레 돈을 번 사람은 남을 위해, 특히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대체로 인색하다.

한인사회 문화예술 행사에 가보면 돈푼께나 있는 사람들 모습은 잘 안 보이는 것이다.

0…이런 이민사회에서 캘거리의 이유식 시인(83)은 부와 문화예술을 구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50년 전 단돈 200불을 들고 캐나다로 온 그는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일을 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단지 돈 버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동포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여러 단체장을 맡아 일했고 모국의 불우한 농어촌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상도 받았다.

0…고상한 문학취향을 지닌 그는 분주한 일상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많은 시집도 냈다.

특히 17년전 사재(私財)를 털어 자신의 아호를 딴 ‘민초(民草) 해외문학상’을 제정, 전세계 한인 문인들을 후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상금은 처음엔 3천불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5천불로 늘었다.

해외동포사회에서 개인이 제정한 문학상은 이 상이 처음이다.

나는 제1회 시상식 때 캘거리로 취재를 갔는데 이 시인은 생각과 달리 무척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0…춥고 배고픈 문인들을 후원하는데 개인 사재를 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아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인은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다.

‘부유한 시인’, 웬지 잘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가장 이상적인 단어가 아닌가 한다. 

0…깊어가는 가을과 연말을 맞아 여러곳에서 한인 문화예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부디 큰 후원은 못할지라도 행사에 참석이라도 해서 궁핍한 예술인들을 격려해주면 좋겠다. (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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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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