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의 추억

-청춘시절 찾았던 산사(山寺)

-세월은 가고 아련한 추억만 남아

*가수 송춘희씨의 '수덕사의 여승' 음반 표지(1966)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

청춘시절 한때 산사(山寺)를 즐겨 찾았었다.

특히 대전 집에서 가까운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와 갑사(甲寺)를 자주 찾았다.

꼭 부처님을 뵈러 간다기보다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은은한 목탁 소리를 들으며 사찰 주위를 한바퀴 돌고 나면 정신이 쇄락(灑落)해지고 모든 잡념이 사라졌다.

0…대학시절 여름방학 때는 예산 수덕사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다.

책 보따리를 싸들고 현실공부(고시)에 인생공부 좀 해볼 요량이었다.

그때 수덕사의 은은한 향불과도 같은 일엽(一葉) 스님 이야기가 가슴을 적셔 그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여성운동가이자 언론인, 시인, 수필가 등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던 인물…

일엽은 왜 속세를 떠났을까.

0…일엽스님의 속세 본명은 김원주(1896년~1971년). 그녀는 참 굴곡진 삶을 살았다.

평안북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나 개화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23살에 마흔을 넘긴 연희전문교수 이노익과 결혼한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던 김원주는 이혼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동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동석한 일본청년이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길은 가시밭길로 변한다.

0…김원주는 일본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나 이내 조선으로 되돌아 왔고, 그 후 무수한 남자와 숱한 염문을 뿌리며 동거와 결혼, 이혼을 반복했다.

속세에서 이렇게 번뇌의 행각을 벌이던 김원주는 결국 33살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의 세계로 들어서 일엽스님이 된다.

‘나뭇잎 하나’라는 뜻의 일엽(一葉)은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이다.

법명(法名)만 들어도 속세의 허무함이 물씬 묻어난다.

0…일엽스님이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의 제자로 치열하게 용맹정진할 때 14살의 아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일엽은 자신은 이미 불문(佛門)에 들어섰다며 아들을 차갑게 내친다.

그때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는 일엽과 같이 1920년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이었던 서양화가 나혜석이 머무르고 있었다.

나혜석도 겉으로는 자유분방했지만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에 방황하고 있었고, 김원주가 스님이 되는 것을 보며 자신도 출가하겠다고 만공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김원주를 받아주었던 만공스님은 나혜석은 받아주질 않는다…

0…일엽스님의 인생 파노라마를 알고 ‘수덕사의 여승’을 들으면 가슴이 메어온다.

노래를 부른 가수 송춘희는 늦게서야 일엽스님에 대해 알게 됐고, 또 스님이 자신처럼 목회자의 딸이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송춘희 역시 이내 불교로 개종했고 지금도 충실한 불자(佛者)로서 구도(求道)의 길을 걷고 있다.

0…일본 유학시기부터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연애 활동을 했던 일엽스님.

그녀는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1971년 74세로 입적했다.

이처럼 굴곡진 일엽스님의 일대기를 되뇌며 법당 주변을 걷노라면 세상사 모든 번뇌가 그저 한줄기 바람처럼 정처없이 날아가 버림을 느끼게 된다.

0…사찰은 사계절 나름대로 풍광이 달라 언제 가도 운치가 있다.

산사는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할 때 찾아가면 언제나 아늑하고 포근히 맞아주어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조용히 법당에 무릎 꿇고 앉아 합장(合掌)하면 잡다한 번뇌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0…지금 수덕사 법당엔 누가 앉아 속세의 번뇌를 씻고 있을까.

번잡한 세상사 잊고 그 산사에 머물고 싶다.

이용우 (한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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