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앞만 보고 걸으면 놓치는 것들
-가끔은 멈춰서서 돌아보는 여유를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전문)
짤막한 이 시 한 구절에는 인생의 많은 의미가 함축돼있다.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거나 인생에서 한창 오르막일 때는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한다.
오로지 정상을 정복하려는 마음 때문에 야산에 흐드러지게 핀 꽃이 아름다운 줄도, 주변 경치가 눈부시게 장엄한 줄도 모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길을 오르니 곁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올라 한숨 돌리고 난 뒤 하산할 때서야 비로소 안보이던 꽃도 보이고, 주변경치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0…한국에서 한창 잘나가던 중견 정치인이 선거에 낙선하고 등산으로 울분을 달래던 어느날 대포집에서 나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 시를 읊조리던 기억이 난다.
그는 그때 말했다.
“오로지 성공하겠다는 목표만 갖고 악착같이 뛸 땐 나 자신이나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모처럼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일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재충전도 하고 서민들의 고충도 더 가까이서 이해하게 됐다. 가파른 인생길에서 가끔은 이렇게 하산(下山)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0…정승집 개가 죽으면 대궐의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이 들끓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또 정승집 말이 죽었다면 먹던 밥을 밀쳐 놓고 뛰어가지만 정승이 죽었다면 먹던 밥 다 먹고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권세를 누릴 때는 세인들이 갖은 아첨을 다 하지만 막상 권세가 없어지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세상인심은 이처럼 야박하고 삭막하다.
0…나 역시 이런 경험을 많이 겪었다.
(한국의) 신문사 요직에 있을 때는 하루종일 전화통에 불이 나고 일주일 내내 저녁약속이 줄을 이었다.
오죽하면 만사 제쳐놓고 조용한 사찰에 들어가서 며칠 푹 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보직(補職)을 마치고 한직(閑職)을 맴돌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직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 연락도 사라져 갔다.
0…그럴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나의 이용가치를 보고 접근한 것이었지 나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님을.
한국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은 이래서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0…현직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리도 들끓던 사람들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뚝 끊긴다.
그러니 허구한 날 등산으로 울분을 달래는 이들이 많다.
그럴때 홀로 산에 올라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고 사색에 잠기면서 비로소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그런 힘든 날을 겪으면서 인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0…정상을 향해 한창 올라갈 때는 못보았던 아름다운 들꽃도 내려올 때서야 발견하고 감탄한다.
나 역시 요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는 시간도 많아졌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던 세상 일들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다.
0…바쁜 일상에 쫓기며 살아갈 땐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산에 오르자니 아름다운 야산의 꽃들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이제 조용히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 놓으니 정서적으로도 한결 편안해진다.
나무가 잎을 떨구듯 가을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계절이라 더욱 그렇다. (南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