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 산책(152)

*“정치냐? 무역이나? 부동산이냐? 택하시오”

민초 이 유식 시인(본 한인뉴스 고문)

*필자가 2019년에 펴낸 자서전 ‘뿌리’ 표지

어정쩡하고 멍충이로 살아온 이 탁란의 생애에서 그래도 꿈이 있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흙의 고향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나의 자식들이 이 아비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라는 마음에서 이런 글을 남겨본다.

우리네 인생 누구나 뒤돌아 보면 한 스럽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성년이 되어가면서 자기의 갈 길에 대한 방향설정을 하게 됨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내가 나의 앞날을 심도 있게 생각한 때는 소공동 111번지에서 밥줄을 달고 있을 때 인 것 같다.

무슨 행운인지 이 직장에 23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밥줄을 달고 몇년을 다니다가 보니 직장을 찾기 전에는 그토록 좋은 직장에서 밥줄을 달고 있음이 큰 소망이었는데 그런대로 보나스가 년간 600%가 나오니 그 시절에는 참 뿌듯한 생활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역시 장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탈출 계획을 곰곰히 하고 있었다.

그 때 신문광고에 현대에서 조선업을 시작한다며 해외파견 과장 공모가 있어 응모를 했더니 이상하게 합격이란 통지가 와서 울산 현대조선 현장 과장 숙소에서 두 밤을 자고나니 또 이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이 때 나는 나의 갈길 정치인이 되려나 무역을 하려나 부동산업을 하려나 무엇인가 3가지 일 중 하나만 성취한다면 나의 삶이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은 망상 속에서 매일 퇴근 후에는 3차 이상의 소공동, 명동,무교동을 전전하며 술타령의 나날을 보낸때였다.

하루는 인천의 i 대학의 학과장으로 있는 선배가 전화가 왔다. 내용은 자기과에 경영학 원론과 마켓팅의 학과목이 신설 되었는데 경험도 얻을 겸 강의를 해보라는 건의였다.

수많은 후배들 중 나를 선택해서 대학강단에 서 보라하니 정말 걷잡을 수 없는 희망과 꿈이 펼처지는 것 같아 많은 망설임 속에서 선배님에게 감사를 드리며 수락을 하고 일주일에 4시간을 대학강단에 서는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었다.

그 때 학기말 종강을 할 때 건방을 떨며 학생들에게 위의 3개의 사나이의 갈길을 이야기를 했었다. 이는 평소에 내가 나의 갈길에 대한 생각이 었다.

이와 같은 말을 다른 교수들로 부터 들어보지 못한 학생들이 오늘은 송도 백사장에 가서 바람을 '쏘이자 하면 송도에서 소주잔을 기울인 기억이 있었다. 지금 생각에는 내 삶에서 지울 수 없는 낭만의 시간이었다.

내 삶의 원대한 꿈은 1974년 탁란의 생활의 길을 찾았고 공부를 더 한다는 명분은 재되어 흩어지자 평소에 생각했던 정치의 길에 도전하자는 생각을 했다.

이에 나의 정치 관련 이야기를 독자들을 웃게 하고자 여기에 서술해본다.

때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두번에 걸처 대권에 도전을 한 때였다. 어떤 날이던가 그 때 토론토 한인회장이던 서 0경 회장께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돕기 위한 후원회 결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즉 후원회 결성은 토론토한인회장이 캐나다에서 한인이 제일 많이 살고 있기에 본인이 선임될 것 같으나 고문이 마땅한 분이 없어 이 고문 자리를 맡아 달라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왜 농담을 하시느냐고 사양에 사양을 했더니 이 회장은 한인사회의 조직에서 연륜과 지역을 떠나 자기보다 선배이니 맡아서 같이 일을 하자는 간곡한 청이였다.

그때 나는 서 회장이 인생의 선배, 이민의 선배, 학연의 선배이기에 고문 자리를 극구 사양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런데 얼마후에 서 회장께서 다시 전화가 와서 모국에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서 회장과 같이 참여하였고 전당대회가 끝난후 이 회창 총재의 초대로 여의도 유명 일식집에서 후풀이 파티를 해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하면 서 회장의 심해와 같은 깊고 높은 지도력과 부족한 사람에게 정치가 무엇인지 알으켜준 선배로서 고인이 되었지만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선배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김 대중 대통령 당선 때 당선자 비서실장을 맡았던 유 0건(작고)님과 해외 동포협의회를 창립할 때 깊은 인연을 맺고 친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북구 민주당 3선 의원이 였던 유의원이 모국에 와서 정치를 할 의사가 있으면 이야기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만 해도 그 명예를 중요시하던 나는 경상북도 정무부지사 자리가 주어진다면 귀국할 용의가 있다고 나의 뜻을 밝혔다.

얼마 후 경상북도는 어렵고 전라북도라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의견이었다. 이때 사양한 기억이 흑백 필림처럼 돌아 가고 있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한나라당 국회 부의장이던 홍 0덕(작고) 의원께서 고향에 와서 출마를 할 의향이 있다면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며 의견을 타진해 왔었다.

나의 고향 봉화, 영덕, 영양지역인데 귀국하여 현지 사정을 보니 한번 낙선을 하면 다음에는 가능하리라는 나대로의 결론으로 사양을 한 기억이 있다.

이로써 내가 한때 정계를 기웃 거리던 나의 야심은 나 같은 멍청이가 정치. 그 아수라장에 발을 붙이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두번 다시 정치 관계에 관한 망상은 접은 기억이 있다.

이제 8순이 넘어 나의 삶을 반추를 하니 정치를 해보려고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그 후 보따리 무역과 부동산(세일즈맨이 아닌) 사업으로 지금 여기까지 와서 이제 몇년을 더 이 지구상에 내가 머물까를 생각하니 너무나 허탈하다.

200불 들고 이방인이 된 탁란이 무엇을 더 바라랴. 그저 돈 꿔 달라는 말 안하고 오늘에 안주함에 감사 할 따름이다.

인생살이 헛되고 헛된 것인 것을… (민초 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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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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