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그대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
“길을 묻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국가대표 수영선수…배우의 꿈을 꾸던 젊은이
-17살 때 불의의 사고로 인생 송두리째 뒤바뛰어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나마 차별 덜한 캐나다에 와서 제2의 인생
-세상의 편견과 맞서 OTT플랫폼사에서 두각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백민준 스토리
*다음은 한국의 장애인신문인 <Ablenews>에 게재된 기사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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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영의 컬러풀 캐나다 <백민준 인터뷰>
“계단보다 높았던 외면의 시선”
배우의 꿈을 꾸던 백민준 씨는 17살 때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친 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배우의 꿈을 꾸고 접고 수영을 시작했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태극마크를 달고 국내외 다양한 수영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그도 장애인을 향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과 부당한 대우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캐나다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의 권유로 캐나다에 오게 되었다. 캐나다에 온 이후에도 수영 선수로 국제 대회에서 큰 성과를 냈다.
현재는 글로벌 OTT 플랫폼 회사에서 북미 교육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일 외에도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이사로서, 그리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휠체어 유튜버 ‘굴러라백곰'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황서영(이하 황) : 사고를 당하신 상황이 ‘작품을 찍고 있던 중 낙산’이라고 다른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어요. 어떤 작품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백 : 좋은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기 위해 인문계에 진학했지만 사실 공부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좋은 대학을 공부로 갈 수 없어진 거죠. 그때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어차피 공부에 큰 열정이 없다면 네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연기의 꿈을 펼쳐보는 게 어떻겠니’.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우연한 계기에 아역 배우로 캐스팅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때 제가 아쉬워한 것을 기억하셨다가 제안해 주신 거였어요.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작품이 전쟁 관련 작품이었고 2번의 오디션을 본 후 운이 좋게도 주연급으로 캐스팅이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허세가 가득했던 것 같아요. 나도 유명해질 수 있다는 마음에 신이 났던 거죠. 작품 이야기를 좀 드리자면, 6.25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예요. 강원도에서 자란 죽마고우 친구들과 서로 총을 겨눠야 했던 비극이 벌어지는 내용이에요. 1999년에 제작이 되고 2000년에 상영 예정이었던 작품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정치적인 이슈로 결국은 상영 가처분 신청이 떨어졌어요. 아쉬웠어요.
-황 : 그래도 작품 촬영은 마무리가 되었나 봐요.
*백 : 네, 다행히 제가 나오는 마지막 씬까지 다 찍고 나서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상영은 못했지만 작품은 완성이 된 셈이죠. 그때 감독님께서 주셨던 녹화 테이프가 한국 본가에 있을 거예요.
-황 : 배우를 꿈꾸셨고 좋은 기회도 얻으셨는데 갑자기 당한 사고로 그 꿈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이 매우 힘드셨을 것 같아요.
*백 : 전혀 상상을 못 했죠.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될 줄은요. 처음에는 허리를 조금 삐끗한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술을 받고 나서도 다리에 감각이 없고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도 상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그때서야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었어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물론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화목했던 가정이 저의 사고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거였죠.
특히 부모님이 저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덤덤한 척하는 걸 지켜보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안 좋은 생각까지 할 정도로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오죠.
-황 : 세상을 원망하며 같이 얼싸안고 엉엉 울기라도 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척 애쓰시고 있다는 걸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했던 그 마음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꺼내기 힘드셨을 텐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휠체어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 하나만 여쭤볼게요.
*백 : 사실 장애의 유형이 무척 많기 때문에 제가 모든 장애인을 대변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려 볼게요.
장애인으로서 일단 문밖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실 엄청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인데 그런 정신적인 극복을 한다고 해도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어요.
보도블록도 경사가 있는 곳들이 많아 넘어질 뻔한 적도 많고요. 그래도 저는 긍정적인 편이라 야외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주변 환경 시설이 전혀 받쳐주지 못하니 용기 자체가 짓밟혔다는 생각이 들었죠.
-황 : 경사로가 없는 곳을 보면 휠체어를 떠올리긴 하는데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까지는 저도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저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었는데 휠체어를 타는 입장에서는 불편할 뿐 아니라 다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되겠네요. 시설이나 제도 말고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도 힘든 부분이 많으셨겠어요.
*백 :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죠. 제가 짐을 싸들고 캐나다로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녁 시간이 되어가니 사람들이 많아졌죠. 그런데 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문이 열리자마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먼저 탑승을 하는 바람에 저는 못 타는 상황이 계속되는 거예요.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4번을 그냥 보냈어요. 그러다 5번째 엘리베이터가 오고 또 뒤에 온 사람들이 새치기를 해서 먼저 타는 상황이 펼쳐졌죠. 그때는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폭발했어요. 문을 잡고 사람들에게 소리쳤어요. 당신들 때문에 지금 나는 여기서 30분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내리지 않고 제 눈을 피하면서 가만히 있더라고요. 그때 사람들이 ‘뭐야? 쟤 왜 저래?’하는 눈으로 절 바라보더라고요.
-황 :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고요?
*백 : 네, 그래서 결국 경비원을 불렀고, 그분이 강제로 사람들을 내리게 한 후에 겨우 탈 수 있었어요. 당연한 권리인데 구걸해서 얻어야 하는 그 기분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황 : …… 그게 언제였나요?
*백 : 그때가 2002년 정도 되었을 거예요. 운동선수 한창 하고 있을 때였어요. 장애인 주차 지정석에 비장애인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주차를 하던 때였어요.
-황 : 제가 얼굴이 다 화끈 하거리네요.
*백 : 그때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아마 지금은 조금은 달라졌을 거예요.
-황 : 그렇겠죠? 아무래도… 하지만 그 속도가 다른 분야의 발전에 비해 너무 느린 것 같아요. 창피하고, 안타깝고, 씁쓸하네요.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캐나다에서 다시 수영을 하게 된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백 : 한국에서는 수영으로 국가대표를 10년 넘게 했어요. 한국에서 선수 은퇴를 했기 때문에 캐나다에 와서는 운동을 내려놨었어요. 근데 캐나다가 너무 좋아서 살고 싶은데 가장 빨리 영주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운동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죠.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인종차별 때문에 힘들었어요. 캐나다 사람들은 친절한데 문제는 이민자들이었어요. 캐나다가 워낙 다인종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많이 오는데 아시안이라고 엄청 무시를 받았죠. 그래도 코치님이 정말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영어도 제대로 안 되던 때였는데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황 : 이민자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하셨군요.
*백 : 정말 서러웠어요. 그래서 공식 훈련이 끝나고 나서도 혼자 남아 이 악물고 개인 연습을 하고 그랬죠. 그러다 인종차별을 했던 사람들과 국제 대회에 나가게 됐고, 다행히 성적이 괜찮아서 메달을 5개 땄어요.
-황 : 와, (박수) 저 지금 팔에 소름 돋았어요. 멋지네요.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진짜 그 자식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신 거네요.
*백 : 네, 메달을 좀 따고 나니까 그때부터는 대우가 좀 달라지더라고요. 하하.
-황 : 제 에세이 책에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썼어요. ‘이방인으로서 그것도 아시안으로서 대우를 받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는 조건 없이 주어지는 권리와 존중이 우리에게는 메달을 두어 개 따고 나서야 겨우 주어진다.’ 출발선이 다른 게 억울하다고 느꼈어요. 사실 메달을 딴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인간으로서의 존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백 : 아무리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한국에서 사는 게 아니면 어딜 가나 그런 부분은 있는 것 같아요.
-황 : 공감합니다. 지금은 수영 강사로서 활동하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외에 다른 경제 활동도 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백 : 현재는 OTT플랫폼인 D사에서 북미 교육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 전공도 장애인 체육 교육 쪽이었는데 가르치는 일에 유독 보람을 느끼고 있어서 매우 만족하며 일하고 있어요. 제가 있는 토론토 지역에 성인장애인공동체라는 단체가 있는데 막내 이사로 활동하면서 행사가 열리면 웃음을 드리는 사회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황 : 수영이나 체육과 관련이 없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계신 게 인상적이에요.
*백 : 저도 신기해요. 제가 이런 쪽으로 일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황 : 다른 인터뷰에서 더 큰 세계를 보고 싶어 캐나다로 왔다고 하신 걸 들었어요. 기대하신 만큼 큰 세계를 경험하셨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백 : 네, 그건 확실히 경험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캐나다뿐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든지 본인 스스로가 진취적으로 활동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야지 큰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아니라면 결국 어디에 있든 우물 안 개구리에 벗어날 수 없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내가 장애인이니까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기적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의지를 보이고 노력을 해야 성취도 있는 거지 가만히 있는데 행운이 나에게 굴러오는 기적 같은 건 없어요.
-황 : 아무리 맞장구를 쳐도 지나치지 않을 말씀이네요. 말씀 들으면서 저를 한 번 돌아보게 됐어요. 나는 과연 캐나다에 와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경험과 기회에 열정을 쏟았나, 혹은 쏟고 있나……. 창피하지만 아마 민준 님의 열에 하나만큼도 안될 것 같아요. 하하.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당당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던 그가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이마와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당사자와 그의 가족이 겪었을 좌절과 고통이 긴 세월과 먼 거리를 지나 여기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뜨겁고 시렸다.
겨울 낚시를 유독 좋아한다는 그의 다채로운 유튜브 영상들은 그가 얼마나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얼음 위에서 바로 잡아 회 뜬 송어회 한 점과 독주 한 잔에 온 세상 행복을 다 가진 얼굴을 한다.
그런 그도 힘들어했을 만큼 한국의 시선들은 얼마나 심했던 걸까. 감히 짐작하는 것조차 실례일 것 같아 상상하기를 멈췄다.
그의 휠체어를 돌리게 한 것은 경사로 없는 계단이나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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