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외출

<서광철 칼럼>

7년 만의 외출

울기를 잘했다. 그래서 사내애가 왜이리 눈물이 많아 라는 말 듣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눈물이 나올라 하면 울음이 나와 하는 대신 "코가 쓰려”라는 표현을 사용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있다. 1차 대전 당시 이태리 포로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논리철학 서술"이라는 철학서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이며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명제를 남기고 1922년경 철학계를 홀연히 떠난다.

그는 1929년 그가 떠났던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온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 언어로 정확히 표현, 지시할 수 있는 것만이 정확한 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이 한계가 있으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외국에 오래 살던 우리 부부가 고국을 방문하였다. 식당에 가게 되었다. 벽에 “물은 셀프입니다’ 라는 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아 가게주인이 희랍철학이나 노자철학의 "태일생수"혹은 "상선약수"를 표현한 것인가 하여 용기를 내어 주인에게 그 뜻을 물었다.

그 주인은 별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으로 컵과 물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은 셀프예요 하고 그냥 가버린다. 이민생활 50년 가까이 불어권에서 불어, 영어권에선 영어 심지어 이탈리안 고객이오면 이태리말로 눈치라면 한가닥 하는 내가 어찌하여 물은 셸프입니다를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언어가 주는 의미는 지역과 상황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드리려 하는 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청년기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물은 셸프입니다는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말이 안 되는 것에 침묵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7년이라는 세월은 언어라는 것은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일어날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처하여 주관적 결론보다는 객관적 사실에 무게를 둔 언어 게임의 규칙을 제시하였다.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1968년 내 동료 중 한 명이 문학도였던 여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녀의 편지를 보여 주었으며 비교적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그 친구를 대신해 답장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인용한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번민"이었다.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의 선택으로서 베르테르의 극단적 선택을 죽음을 극복한 숭고한 사랑의 승리로써 극찬하며, 병영생활의 삭막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요 안식처로서 그녀를 표현하였었다.

그 편지에 감명받은 그 여학생은 나의 동료가 휴가를 갔을 때 그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던 나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편지를 쓴 기억이 있다. 그러나 비교적 순진(?)하였던 내 친구는 편지의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 하였으며 우리는 그녀로부터 함께 절교 편지를 받게 된다. 내 기억을 더듬어 그 편지의 일부를 여기 소개한다.

 “…오빠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랑의 편지였습니다. 나는 사랑의 환희와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빠의 편지를 몇 번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사랑의 눈을 뜨게 되었고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허나, 그 기쁨은 오빠가 편지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였을 때 허공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의 주인공 제리 듸르드에 비교하며 맹인이었던 그녀가 광명을 찾았을 때 그녀가 사랑하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심정으로 나를 연애사기범으로 몰아 부친 적이 있었다.

사랑은 감미롭고 달꼼하다. 가끔은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프렌드리하게 말하여질 수 있지만 상대와 상황에 따라 잘못 받아지면 미투(Me Too)로 둔갑하여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사랑이라는 한 동일한 언어라 해도 어떻게 사용되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그 사랑의 불꽃이 설렘과 기쁨으로 큰 행복을 듬뿍 안겨줄 수도 있지만, 반면 큰 불행의 고통을 줄 수 있는 시작일 수도 있다.

사랑은 행복과 불행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제 비트겐스타인이 그의 저서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려는 것을 알겠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배경과 문맥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내가 울 것 같아 라는 말 대신 "코가 쓰려" 하였다면 청년기의 비트겐스타인은 어떻게 코가 쓰릴 수 있지? 그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장년기의 그는 나의 삶의 배경과 문맥을 알았을 때 그 사내애가 눈물이 자주 나와 울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코가 쓰리다 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왜 내 친구의 여학생은 편지의 비밀을 알았을 때 더 이상 나의 친구를 남친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사랑이라는 언어가 주는 그녀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선 더 이상 내 친구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7년 만에 돌아와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하였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1929년 비트겐슈타인이 캠브리지에 돌아와 철학에 컴백하였을 때 "신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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