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의 인생길 산책 121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방문기(1)

-이유식 시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벌써 2년이 지나갔다. 그 해 가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물머리의 공간 속에 자리잡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찾은 날은 가을이 짙어가는 정오 시간이었다.

조국의 선현들 중의 한 분, 제가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 다산 선생의 생가를 찾음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산 선생의 묘소에 배례를 하고 선생의 동상을 만져볼 수 있는 순간은 나에게 뜻 깊은 시간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이며 철학자임은 우리 후대들이 깊이 간직하고 선생의 업적을 본 받아 조국의 세세연연 번창은 물론, 후대에 영원히 계승시켜 나감이 후학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생가 옆의 사당 묘소 등을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 경내를 걸어본 기억을 더듬어 본다.

선생의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다산, 사암, 탁요, 태수 등 다수이며 시호는 문도라 기록되어 있다. 출생은 1762년 8월 5일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이며 사망은 1836년 4월7일이다.

형제 자매는 약전, 약용, 약형, 약현 등이며 자녀는 학유, 학연, 효순 등이 있었으며 부인은 풍산 홍씨로 기록에 나와있다. <위키백과의 내용임>

선생의 수많은 저서를 다 나열할 수 없기에 여기에서는 선생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에 관하여 살펴볼까 한다.

그는 집권층에 대하여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 질서의 강화에 협조하고 아래로는 애민, 교민, 양민, 훌민하는 목민지도를 확립, 미래 지향적인 유학의 기본 가르침과 민본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일반 백성들을 향한 조언으로는, 한 두 끼 굶고 삐쩍 마르거나 한 끼 배불리 먹고 금세 표가 나는 것은 천한 짐승들의 일이다. 이 말은 상황의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군자의 몸가짐이 아님을 강조했다. 또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들뜨고 가라앉지 말라, 다만 바람이 불어서 흔들 수 있는 것은 물결 표면뿐이리라.

일이 잘못되면 스스로 반성할 뿐 남을 탓하지 말라, 내 스스로 떳떳하며 누가 뭐라 하든 굽히지 말고 전진을 하라. 남이 내게 함부로 굴거든 스스로를 돌아보라, 내가 나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니까 남들도 나를 업신여긴다. 실 없이 칭찬을 하면 말이 무게를 잃게 되니 근거 없이 비방하면 칭찬과 비방이 나에게로 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새로운 것과 괴상한 것을 혼동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허물로 이끄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물이 새는 항아리에는 아무 것도 못 담는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한번 믿음을 잃으면 깨진 독이 된다. 즐거움으로 자신을 짓이기지도 말라 상처가 깊어진다.

슬픔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변한다. 사람이 누구나 허물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허물이 있을 때 이를 돌이켜 뉘우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여 나날이 향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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