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멸치’의 추억

-명절때마다 배달돼온 멸치 선물

-세월이 흘러 살풋한 추억으로 남아  

*명절에 부친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YS와 말년의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YS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국회와 청와대를 출입하던 시절, 추석과 설 등 명절 때마다 집으로 배달돼온 소담한 소포엔 예외없이 빛깔 좋은 멸치 한포가 들어 있었다.

아내는 우리만 먹기가 아깝다며 친한 이웃에게도 나눠주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조금씩 밑반찬 혹은 술안주로 내놨다.

당시 언론사 기자를 비롯해 고위 정치인 등은 ‘YS 멸치’ 한번쯤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것을 오고가는 정으로 생각했지 뇌물이라 여긴 사람은 없었다.

다른 명절선물로 한과나 김, 이따금 갈비도 있었지만 짭짜름한 멸치의 맛은 아직도 혀끝을 맴돈다. 

0…김영삼(YS). 비록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리 후한 편이 못 되지만 그가 한국 민주화의 큰 획을 그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치하에서 그의 목숨 건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훨씬 늦춰졌을 것이다.

특히 YS의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그가 쩨쩨하지 않고 깨끗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인정한다. 왜 그런가.

그는 검은돈에 곁눈질할만큼 구차하게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YS는 유복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돈에 짜지 않았다.

측근들과 식사를 한 후 식대를 계산할 때 자신의 지갑을 통째로 참모에게 맡기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푼돈에 인색하지 않았기에 그의 주변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들었다.

야당시절 온갖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돈에 쪼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0…YS가 돈에 후했던 것은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번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김홍조 옹)가 멸치어장에서 번 돈을 아들의 정치자금으로 끊임없이 대주었던 것이다.

김옹은 거제와 마산에서 어장을 크게 했던 선주(船主)로, 16살 조혼(早婚)에 나은 아들 영삼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YS가 험난한 정치 역정과 굴곡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야당 총수를 거쳐 결국 대통령에 오르기까지는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한 아버지의 덕이 지대했다.

만약 YS가 돈에 굶주렸다면 가시밭길 야당생활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0…김옹은 평소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아들의 야당시절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자신이 잡은 멸치는 물론, 인근 수산업자들로부터 사들인 멸치 수만 포를 서울로 보내 명절선물로 쓰게 했다.

이때부터 ‘YS 멸치’는 세인들의 입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김옹은 그러나 생전에 아들에게 주기만 했지 받아본 적이 없었다.

YS는 후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아버지의 소망을 단 한건도 들어주지 못한 게 제일 후회된다"며 아쉬워했다.  

0…김옹은 1960년 부인을 공비(共匪) 총격에 잃은 후 거의 반세기를 혼자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잃지 않은 아들도 대통령 재임시 자주 아버지께 안부전화를 하고 찾아뵙기도 했다.

특히 김옹은 과묵하고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아 아들이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청와대를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0…김옹은 지난 2008년 9월 이맘때 97세로 타계했다. 내일(9월 30일)이 바로 김옹의 기일이다.

YS는 아버지 장례식에서 “부친이자 평생 후원자였던 고인께서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나를 부담스럽게 한 적이 없다. 자식이 대통령에 올라도 부탁은커녕 청와대 한번 다녀가신 적이 없을 정도로 공명정대했던 분”이라며 울먹였다.

향년 97세라면 호상(好喪)이라 할법한데도 아버지를 보내는 81세 아들의 마음은 여느 자식이나 같았나보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0…YS에 이어 김대중(DJ) 대통령은 추석같은 명절 때 주로 한과(韓菓)를 보내왔다.

이 역시 우리는 친척 및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며 “대통령 하사품”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오늘처럼 추석명절이 오면 가끔 아내와 함께 그 시절 선물 얘기를 하며 옛 추억에 잠겨본다,

엎치락뒤치락 허구한날 아귀다툼에 진절머리를 내며 떠나온 조국이 지금은 마냥 아름답던 추억들만 새록새록 떠오르니 무슨 조화인지…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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