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충청도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륜월)/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綵服斑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산이 겹친 내 고향은 천리련마는/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할꼬’(신사임당 ‘어머니 생각’)
이 시는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있을 때 고향인 강릉에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인가 국어책에서 배웠던 것 같은데 지금 읽어도 고향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이 한폭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O…1994년 9월 어느날,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자택. 현지 한국 특파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윤 선생의 한 지인이 찾아왔다. 그는 "선생님께 드리려고 통영에서 온 멸치를 갖고 왔습니다"라며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순간 윤선생은 "통영멸치라구? 이게 정녕 통영멸치란 말이오?"라고 울음 섞인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 그는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평생 조국을 등지고 살다 1995년 베를린에서 작고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작곡가. 꿈에도 잊지 못한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그이지만 평생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망향의 한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그 귀중한 정신적 요소를 몸에 지니고 예술에 표현해 작품을 썼다. 해외에 체재하는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 잔잔한 바다, 푸른 물, 파도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음악으로 들렸다."
고인의 미망인 이수자 씨는 “남편은 고향땅 통영이 보고 싶어 한일 해역까지 배를 타고 가 멀리 가물거리는 통영항구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다 돌아오곤 했습니다. 먼 독일땅에 살면서 생의 마지막 끝자락까지 통영 앞바다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노후를 고향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유언도 ‘고향인 통영에 묻힐 수 없다면... 차라리 베를린에 남겠다’고 하셨지요.”
O…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윤이상 선생 같은 예술 거장에게도 고향은 언제나 그립고 애달픈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멀리 떠난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그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지금은 그의 업적을 기려 세계적 음악가들이 모이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윤 선생 자신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에서 퍼간 한줌 흙과 함께 이국땅에 묻혔다.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오페라(‘나비의 꿈’)처럼 한마리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날아가는 꿈을... 그의 묘비에는 "고향 통영에서 퍼온 흙 한줌과 함께 여기 잠들다"라고 써있다.
O…천재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그는 사망하기 1년반 전인 2004년 10월, 뉴욕 자택 근처에서 생애 마지막 퍼포먼스를 펼친 뒤 한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어느 기자가 "앞으로 뭘 가장 하고 싶으시냐"고 물으니 백남준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고향 창신동에… 한국 가서 묻히는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라고 답했다.
시대를 앞서간 탓에 ‘미친놈’ 소리를 듣기도 한 그였지만 그가 이뤄놓은 예술적 성취는 지금도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런 백남준 역시 고향에 대한 향수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처럼 고향은 아무리 자기성취를 이루고 뜻을 관철해냈어도 언제나 잊지 못하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O…이곳 이민사회엔 이런저런 모임과 단체가 있지만, 가장 부담없고 정겨운 모임이 바로 향우회(鄕友會)가 아닌가 한다. 이민자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고향의 추억과 향수를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향 출신끼리 만나면 정서가 비슷하니 부담 없이 어울린다. 무엇보다 말투가 같아 친근하다. 고향친구야말로 바로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다. 한국에서는 동향끼리 너무 밀착돼 이권을 주고 받는 비리로 이어져 문제이지만 사실 이처럼 포근한 관계도 흔치 않다.
내가 본의 아니게(?) 향우회장을 맡게 됐다. 수년 전만 해도 향우회장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만 하는 줄 았았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그럴 나이가 됐나 보다. 누구는 내가 또 감투를 썼다고 농을 하지만 향우회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고향분들이 서로 따스한 정을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다.
O…아무리 타국 삶의 연륜이 쌓여가도 이국땅은 여전히 낯설다. 나는 지금도 포근했던 고향의 옛모습이 수시로 눈에 어른거린다. 고향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고향은 그런 존재다. 현실이 고달프고 시릴 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착 가라앉는 카타르시스 같은 청량제…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고/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