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夜學)을 아십니까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 학생들

-궁핍 가운데 피어난 헌신적인 사랑

*허름한 야학 교실에서 향학열을 불태우는 학생들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오는 아이를 쫓을 수는 없다. 영신은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하는 찬송가 구절을 입속으로 부르며 '오냐, 예배당이 터지도록 모여 오너라, 여름만 되면 나무 그늘도 좋고, 달밤이면 등불도 일없다.’ 하고 들어오는 대로 받아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젊은 사람들의 응원을 얻어…' 

일제시대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으며 채영신과 박동혁 같은 애틋한 사랑을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듯, 일제강점기에 많이 운영됐던 야학(夜學)은 대학생 등 젊은 지식인들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밤에 공부를 가르치던 비정규 학교였다.

야학은 해방 후 2000년대까지도 근로청소년과 극빈아동 등을 대상으로 운영돼왔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도시 저변계층에서 일부가 남아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0…청년시절 나는 직접 야학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다.

아내를 만나 정이 깊어진 것도 바로 야학을 통해서였다.

아내는 대학 시절 인천의 한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졸업 후에도 그 일을 계속했다.

나는 아내 될 사람이 야간학생들을 가르칠 정도의 인성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되리라는 믿음이 갔다.

0…어느 여름날 밤, 아내 될 그녀는 나에게 꼭 소개해드릴 분이 계시다며 허름한 교회 교실로 나를 안내했다.

모깃불을 피워놓은 그곳에선 대학생 교사들이 어린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인사말을 건넸다. 돌아보니 훤칠한 키의 미남형인 교장선생님이 계셨다.

열 한살 차이인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0…타향인 인천에서 교장선생님은 나의 친형님 이상이 돼주셨다.

우리는 죽이 맞아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형님도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어쩌다 떠맡게 된 야학과 어린 학생들을 버리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국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됐다.

0…내가 인천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는 이곳저곳 아는 분들을 야학 후원자로 연결해주곤 했다.

그나마 세상인심은 따뜻해 주변에서 후원의 손길을 내밀어주긴 했으나 그것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수밖에 없었다.

0…가장 큰 문제는 안정된 교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교회나 독지가들이 빈 건물을 내주긴 했으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나가야 하니 툭하면 교실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그 와중에도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경사도 있었다.

정규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되는 어려운 환경 속에도 밝은 얼굴을 한 학생들 모습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0…온갖 역경 속에도 야학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교장선생님 뒤에서 궂은 일을 묵묵히 견뎌내며 뒷바라지를 해낸 사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사모님은 밖에서 한푼도 벌어오지 못하는 가장(家長)을 절대로 탓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천직 아닌가요?”라며 웃어 넘기셨다.

사모님은 곤궁한 살림에도 대학생 교사들을 초대해 밥상을 차려주시곤 했다.

0…궁핍한 환경에서도 교사들과 함께 여름캠핑을 다녀온 추억들이 아름답게 남아 있다.

친형제 이상으로 형님과 정이 깊어갈 무렵 나는 ‘이민병’에 걸려 고국을 등지게 됐다.

우리가 떠나오던 날, 어느 과수원 평상에 펼쳐진 송별회 자리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교장선생님을 잘 보살펴 드려다오” 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모임자리는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했다.

공항까지 배웅나오신 형님 내외분이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모습이 선하다.

0…캐나다 정착 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형님과 소식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이내 연락이 뚝 끊겨버렸다.

그러다 9년 만에 고국을 가게 됐고 이때 가장 먼저 찾아뵌 분이 바로 형님 내외분이셨다.

두 분은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사모님은 멀리서 온 ‘시동생’에게 맛난 음식을 해주고 싶다며 바삐 움직이셨다.

그때 내온 얼큰한 김치찌개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0…40대 중반에 결혼한 두 분은 외동딸을 하나 두었는데 우리가 이민을 떠나오고 소식이 뜸해지자 그 딸이 우리딸과 SNS를 통해 교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 큰딸은 최근 사모님이 폐렴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나와 아내는 걱정은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수시로 전해오는 소식이 별로 안 좋았다.    

0…언젠가 한인행사에 참석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휴대폰에 슬픈 사연이 떴다.

“사모님이 돌아가셨데요…”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사모님이 즐겨 부르시던 ‘그 겨울의 찻집’이 떠올라 눈시울이 뿌옇게 흐려졌다.

60살 반 평생을 고생만 하시며 남편 뒷바라지를 해오다 이제 겨우 딸내미가 취직을 해서 곧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즈음에 당신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0...야학 교장선생님 내외분과는 온갖 정이 들어 이별을 아쉬워 했는데 이민 와서는 모든 것이 끊어졌다.

사모님처럼 그렇게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인연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0…추운 겨울날, 허름한 교실 한켠에 모여앉아 라면을 끓여먹던 야학생들 얼굴이 떠오른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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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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